일관성의 원칙

20세기 초, 엔지니어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기술과 기업가 철학을 확립했고, 지금까지도 이를 일관되게 이어오고 있다. 근본에 충실한 자세는 회사의 지속적인 성공을 위한 토대를 이룬다.

   

처음부터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경쟁을 통해 혁신과 효율성이 가속화될 것으로 확신했다.

1893년 페르디난트 포르쉐 ...

... 태어난 집에 직접 배선하며 설치한 전기 조명 설비와 페르디난트 포르쉐.

포르쉐의 역사는 전기에서 시작되었다. 20세기 초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최초로 전기와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설계했다.

올해는 1875년 9월 3일, 회사 창립자가 탄생한 지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오늘날 포르쉐의 역사는 효율적인 내연기관, 혁신적인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순수 전기 스포츠카 등 다양한 구동장치를 개발하며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일찍이 기술과 기업 측면에서 새로운 표준을 세웠고, 회사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설계와 원칙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아들 페리가 아버지의 이념을 계승했고, 1948년에 가문의 이름을 붙인 최초의 자동차 356 ‘No.1’ 로드스터를 선보였다. 최초의 356 이후, 스포츠카 제조사는 포르쉐라는 이름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변함없이 일관성을 유지하며 성공의 기초를 다졌다.

젊은 엔지니어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혁신적인 구동장치 기술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1900년에는 휠 허브 모터로 구동되는 독창적인 로너-포르쉐 시스템을 적용한 전기 자동차를 파리 세계 박람회에 출품했다. 전 세계 관람객이 그의 이름에 주목했다.

Two men are sitting in an early automobile on a studio background, both wearing hats and dressed in early 20th-century clothing.

전기의 시작:

1900년,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직접 설계한 최초의 자동차 중 하나인 로너-포르쉐 전기 레이스카를 운전한다. 뒤에는 비엔나 플로리드스도르프 공장의 Jacob Lohner & Co. 운영 책임자인 칼 파우랄이 앉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전기 구동과 내연 기관을 결합하는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같은 해, 세계 최초의 상용 하이브리드 자동차인 로너-포르쉐 ‘젬퍼 비부스(Semper Vivus, 라틴어로 항상 살아 있음)’를 개발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이 콘셉트를 발전시켜 나갔다. 로너-포르쉐 ‘믹스테’는 하이브리드 구동장치 기술이 일상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최초의 시리즈 모델이다.

하지만, 이 기술이 널리 보급된 것은 100여 년이 지난 후였다. 2010년, 이 스포츠카 제조사는 ‘인텔리전트 퍼포먼스’라는 슬로건 하에 세 가지 하이브리드 모델을 선보이며 회사 창립자의 유산을 되살렸다.

포르쉐는 타이칸과 마칸 일렉트릭 같은 순수 전기 시리즈, 고효율 하이브리드 드라이브와 내연기관을 적용한 모델을 앞세워 미래 모빌리티를 향한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초기 토대: 포르쉐 DNA

처음부터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경쟁을 통해 혁신과 효율성 향상이 가속화될 것으로 확신했다. 부족한 성능을 개선하기 위해 그는 공기 저항을 낮추고 무게를 줄이는 방식을 택했다. 경량 구조로 유명한 아우스트로 다임러 ADS R의 ‘사샤’는 포르쉐와 후원자인 알렉산더(‘사샤’) 요제프 그라프 콜로라트-크라코프스키가 계획한 소형차의 레이스용 버전이다. 1922년 시칠리아를 가로지르는 대담한 로드 레이스인 타르가 플로리오에서 프로토타입 네 대가 첫선을 보였다. 그중 두 대가 단번에 해당 클래스에서 우승했다. 얼마 후,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슈투트가르트의 다임러-모토렌-게젤샤프트로 이직해 직업과 개인 면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 시기에 그는 시칠리아에서 열리는 타르가 플로리오도 놓치지 않았다. 1924년, 그의 주도 하에 설계된 메르세데스 SSK 컴프레서 자동차는 ‘배기량 1501~2000cc 부문’에서 당당히 3위를 차지했다.

팀워크:

1922년, 아우스트로 다임러 ADS R ‘사샤’는 오스트리아 리스 레이스에서 단번에 최고 기록을 세웠다. 알렉산더 ‘사샤’ 콜로라트 백작은 드라이버 샤를 베타크의 왼쪽에 있고, 자동차 오른쪽에는 페르디난트 포르쉐와 그의 아들 페리가 보인다.

1924년 6월 4일, 뷔르템베르크 공과대학교는 페르디난트 포르쉐에게 ‘자동차 제작 전반, 특히 1924년 타르가 플로리오 우승 자동차의 설계자로서 뛰어난 업적을 인정’해 ‘명예 공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현재까지 회사는 ‘Dr. Ing. h.c.’ 명예 학위를 자랑스럽게 사용한다.

강력한 컴프레서 기술은 파울 다임러의 발명품이고, 포르쉐는 이 기술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이는 설계자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선구적인 기술을 직접 발명하지 않았더라도, 혁신적인 가능성을 발견해 유능한 팀과 함께 개선하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반세기 후 개발된 포르쉐의 터보 기술도 그중 하나다. 회사에서 발명한 기술은 아니지만 (1905년 최초 특허), 포르쉐의 손자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총괄해 1970년대에 완성했다. 처음에는 모터스포츠에 출전할 917 용으로 개발했고, 이후 ‘서킷에서 일반 도로까지’라는 원칙을 충실히 지켜 911(930) 터보 시리즈에 적용했다. 이러한 기술 이전은 초창기부터 회사 창립자의 핵심 구상이자,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브랜드 철학의 주축이다. 터보는 1974년부터 전통적으로 각 911 세대의 최상위 모델을 상징한다.

설계 원칙:

터보 기술을 처음으로 적용한 1970년대 917. 회사의 혁신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다.

가족이 써 내려가는 역사

과거에 계획했던 ADS R ‘사샤’의 양산 버전은 국민을 위한 작고 가벼운 자동차라는 비전으로 구체화되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이미 1920년대에 온 가족을 태울 공간을 갖춤과 동시에, 저렴한 자동차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이 아이디어에 몰두했고, 사위인 안톤 피에히와 포르츠하임의 아돌프 로젠베르거와 함께 자신의 설계사무실에서 이를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설계사무실은 1931년 4월 25일 심각한 경제 위기 속, 슈투트가르트 상업등기소에 등록되었다.

지속 가능한 성공은 끈끈한 팀워크 없이는 불가능하다. 포르쉐는 설계사무실을 설립하면서 검증된 기술자와 엔지니어를 모았다. 거의 모든 구성원이 이전 직장에서부터 그를 따라왔고, 이후 대부분 평생을 포르쉐 및 회사와 인연을 이어갔다. 예를 들어, 포르쉐는 1913년 아우스트로 다임러에서 카를 라베를 만났다. 슈투트가르트 설계사무소 설립 당시, 라베는 수석 설계자로 일했다. 나중에는 업무 대리인, 마지막에는 전무 이사로 활약하며 1968년 사망할 때까지 페리 포르쉐의 측근으로 남았다. 엔진 전문가 요제프 칼레스 역시 아우스트로 다임러 출신이었고, 프란츠 크사버 라임슈피스도 마찬가지로 15세에 아우스트로 다임러에서 사무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차체 설계자 에르빈 코멘다는 슈타이어에서 포르쉐로 이직했다. 그는 196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차체 부서의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가업의 계승도 회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초창기부터 아들 페리를 공동 작업에 참여시켰다. 아들은 아버지의 창의력에서 영감을 얻었다. “아버지는 늘 새로운 지평을 보았고, 시대를 앞서가는 자동차를 끊임없이 만들어냈습니다”라며 페리는 나중에 회상한다.

기술 걸작:

1937년, 슈투트가르트 크로넨 슈트라세의 설계사무실에서 엔지니어와 엔진 전문가 요제프 칼레스(위). 1948년, 페르디난트 포르쉐와 그의 아들 페리, 설계자 에르빈 코멘다(아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가 역사상 최초로 제작한 포르쉐 자동차 356 ‘No.1’ 로드스터 앞에 서 있다.

미래지향적 설계

초창기 설계사무실의 고객사 중 하나가 켐니츠 소재의 반더러였다. 주로 중형 자동차를 개발했고 나중에 반더러 W21/22로 양산을 시작했다. 이후 다른 제조사로부터 섀시와 스티어링 요소 개발 주문이 이어졌다. 포르쉐는 1931년 8월 10일 토션 바 서스펜션 특허를 출원했다. 현재까지도 자동차 공학에서 사용하는 기술 분야의 이정표다.

포르쉐는 1932년 오토바이 제조사인 쥔다프로부터 주문을 받아 염원해 왔던 소형차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다. 뒤쪽에 5기통 방사형 엔진을 얹고 차체를 유선형으로 다듬은 타입 12는 나중에 비틀로 알려진 폭스바겐의 전신처럼 생겼다. 이후 설계자들은 뒤쪽에 박서 엔진을 얹은 최초의 자동차인 NSU용 타입 32를 개발했다.

1933년 봄, 포르쉐는 아우토 우니온에서 혁신적인 레이스카 설계를 의뢰받아 또 다른 돌파구를 열었다. 아우토 우니온의 전설적인 ‘실버 애로’는 16기통 엔진을 운전자 바로 뒤에 얹는 구조여서 최적의 무게 배분을 보장했다. 이 디자인은 지금까지도 모터스포츠에서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550 스파이더, 914, 박스터, 슈퍼 스포츠카 카레라 GT를 포함해 포르쉐 역사 전반에 걸쳐 적용되었다.

1934년 포르쉐는 독일 자동차 산업 제국 협회로부터 폭스바겐의 설계와 제작 의뢰를 받아 소형차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했다. 이 콘셉트는 현대적인 유선형 차체에 시트 네 개를 채우고 뒤쪽에 4기통 박서 엔진을 얹는 구조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 구동 원리는 수백만 대의 비틀에 적용되었고, 나아가 356과 911 스포츠카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기술적 영속성은 오늘날에도 브랜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베스트셀러 911이 전 세계적으로 꾸준한 인기를 누리는 데 바탕이 되었다.

1930년대 중반, 점차 개발과 테스트까지 수행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슈투트가르트 킬레스베르크에 있는 포르쉐 부지의 차고에서 최초의 프로토타입을 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큰 공간이 필요했다. 1937년 5월, 슈투트가르트 주펜하우젠에서 3헥타르 규모의 부지를 인수해 첫 공장을 건설했다. 이곳이 오늘날 포르쉐 AG의 출발점이 된 본거지다(68페이지 ‘Icon’ 참조).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들은 356을 기반으로 스포츠카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그는 페르디난트 포르쉐 팀의 지원에 힘입어 회사를 전략적으로 발전시키고 설계사무실을 자동차 제조사로 확장하며 오늘날 글로벌 기업의 초석을 다졌다. 

이러한 발전은 장기적인 안정성을 보장해 주었고, 여전히 기업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가족의 가치와 전통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고 있다. 또한, 나치 시대에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역할과 같은 비판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이제 포르쉐 회사에서 당연한 지속적인 과제다.

1931년에 설립된 설계사무실은 포르쉐 엔지니어링 그룹 GmbH에 통합되어 2001년부터 바이작 개발 센터 내에 자리를 잡은 고객 개발 부서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소규모로 시작한 포르쉐 엔지니어링은 현재 독일, 체코 공화국, 루마니아, 이탈리아, 중국 등 여러 지역에 있는 사업장으로 확장되어 1,700여 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있다. 자동차 개발에 대한 전문성은 이미 미래 지향적인 부문을 뛰어넘어 기능과 소프트웨어 주제로까지 확대되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유산은 그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 첫날만큼이나 현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방식으로. 

Thomas Ammann
Thomas Amm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