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쟁이와 사교쟁이
발터 뢰를(Walter Röhrl)과 크리스티안 가이스트되르퍼(Christian Geistdörfer)의 랠리 경험을 책으로 만들면 책장 하나는 거뜬히 채울 것이다. 두 사람은 거의 모든 랠리에 참가했다. 하지만 밀레 미글리아(Mille Miglia)에서는 함께 달려본 적이 없다. 며칠 뒤 두 사람은 이 대회에 출전한다.
발터 뢰를은 말한다. “저는 부당한 일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꿋꿋이 살아왔습니다.” 학창시절 그는 수업 종료 10분 전에 먼저 나가도 되었다. 그가 놀림을 받고 다른 학생과 싸울까봐 교사들이 전전긍긍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빨간 머리라고 놀리는 아이들을 흠씬 때려 주기도 했다.“몬테카를로에서 누가 최고인지 모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발터 뢰를의 당찬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대사다. 반대로 1977년부터 1988년까지 발터 뢰를의 보조 레이서 크리스티안 가이스트되르퍼는 사교성이 좋다.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한 사람은 고집쟁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교쟁이이다.고집쟁이는 부당한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욕설을 퍼붓는다. “주의 100m까지울려퍼졌어요.”라고 뢰를은 장담한다.사교쟁이는 마음속으로 분노를 죽이고 신중하게 해결책을 찾는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서로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다. “우리는 콕핏에서 서로에게 목숨을 맡겼습니다.”라고 가이스트되르퍼는 말한다.
“우리는 콕핏에서 서로에게 목숨을 맡겼습니다.” 크리스티안 가이스트되르퍼
요즘 밀레 미글리아 레이스는 목숨을 잃는 일이 많이 줄었지만, 1927년부터 1957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레이싱이었다. 뢰를이 ‘밀레’라고 부는 이 대회는 이제는 명망 높은 클래식카 랠리로 꼽힌다. 가장 빠르게 결승선을 통과하는 팀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80회 이상의 스페셜 스테이지, 패시지 컨트롤, 타임컨트롤에서 최저 벌점을 받은 팀이 우승한다. 다시 말해 특정 시간에 특정 속도로 각 구간을 주행하는 레귤래리티 랠리이다.
91년 전인 1927년 3월 26일 이 랠리가 처음 시작했을 때는 브레시아와 로마를 8자형으로 단 하루에 왕복하며 속도를 겨뤘다. 요즘은 나흘 동안 레이스가 펼쳐진다. 450팀이 로드북의 안내에 따라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를 순회한다. 5월 16일 뢰를과 가이스트되르퍼는 1956년산 356 A 1500 GS 카레라 쿠페에 탑승하여 브레시아에서 출발한다. 몇 주 전에 두 사람은 토스카나(Toskana)에서 만났다. 코스 구간 근처에서 사하라베이지색 클래식카를 몰고 랠리에 적응하기 위해서다.
바이에른 출신의 뢰를은 신중하게 문을 열고 상체를 안으로 구부린다. 와인색 운전석을 쓰다듬고 베이지색 인테리어 트림을 어루만진다. 그런 다음 뢰를은 1m 96cm의 거구를 차 안으로 넣고 문을 닫는다. 그리곤 출발하기를 주저하는 듯 가슴에 팔짱을 낀다. 그는 몇 분간 고요함을 즐긴다. 얼굴에 미소가 흐른다.
그동안 크리스티안 가이스트되르퍼는 복원된 클래식카 주위를 돌며 측면의 스티커를 촬영한다. 거기에는 스톱워치 아이콘과 함께 ‘C. 가이스트되르퍼’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스티어링휠 스티커가 붙어 있고 ‘W. 뢰를’이라고 쓰여 있다. 보닛과 차문에는 ‘230’이란 번호가 눈에 띈다. 네덜란드의 레이서 카럴 호딘 더 보포르(Carel Godin de Beaufort)가 1957년 밀레 미글리아에 이 번호를 달고 출전했었다. 7년 후 이 레이서는 뉘르부르크링에서 사고로 사망했다. 포르쉐356 A 1500 GS 카레라 쿠페의 소유주인 네덜란드계 스위스인 한스 훌스베르겐(Hans Hulsbergen)과 더 보포르의 네덜란드 친구들은 이 번호로 이 레이서를 추모하고자 한다.
“이 자동차는 매칭넘버(Matching Number)차량이고 훌륭하게 복원되었어요. 이 차를 몰고 출전하는 것은 우리에게 영광입니다.”라고 가이스트되르퍼는 감동스런 목소리로 말한다.
레겐스부르크 태생의 뢰를은 큼직한 손을 좁다란 목재 스티어링휠에 조심스레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으로 위아래로 쓰다듬는다. 왼쪽 10시 방향으로, 오른쪽 2시 방향으로. 뢰를은 거의 모든 포르쉐 모델을 운전했지만 356 A 1500 GS 카레라 쿠페의 운전석에 앉아 본 것은 처음이다. 그 동안 가이스트되르퍼는 여러번 차 주위를 돌면서 트렁크를 열고, 배터리 충전 케이블을 감고, 보닛을 들고, 회중전등으로 연료탱크를 비추며 출발 준비를 했다. 그는 전문 보조레이서로서 모든 사항을 점검한다. 뢰를은 ‘오직’ 운전에만 집중 하면 된다. 항상 그래왔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가이스트되르퍼가 차에 오른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는 데 재능이 있습니다. 차 안에 12시간 동안 함께 있으면서 거의 말을 나누지 않는 적도 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주행 내내 안내를 맡는데, 안내가 없으면 자동차 소음만 들려서 좋습니다.” 뢰를이 말했다.지금까지 두 사람은 다툰 적이 없다고 한다.가이스트되르퍼는 11년 동안 함께 일하면서 표지판을 잘못 읽는 실수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잘못 읽는 실수를 두 번까지 허용해 주겠어, 하지만 첫 번째 실수와 마지막 실수를 동시에 해야 해, 제가 크리스티안에게 한 말이였어요.” 71세의 뢰를은이 웃으며 이야기 했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는 데 재능이 있습니다.” 발터 뢰를
랠리가 끝나면 가이스트되르퍼는 현지에서 며칠 휴가 보내기를 좋아한다. 뢰를은 정반대다. “저는 항상 곧 바로 집에 돌아가려했지요.” 두 사람은 상대방의 사생활은 잘 알지 못한다. “발터가 저에게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으면 저는 들어주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캐묻지 않았어요.”라고 가이스트되르퍼는 말한다. “저는 크리스티안을 매우 존경합니다. 그래서 항상 조심스러웠습니다.” 뢰를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는 최근 출간된 가이스트되르퍼의 책을 읽고 자신의 보조레이서에 관해 몰랐던 사실을 몇 가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헤어질 때 포옹하지 않고 여전히 악수를 하지만, 서로를 동료로 여길 뿐만 아니라 친구로 생각한다. “보조레이서는 로드맵을 올바로 해석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줄 알고 대담함도 있어야 합니다.”라고 가이스트되르퍼는 말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옆에서 스티어링휠을 잡고 있는 운전자가 이 아찔한 상황을 극복할 거라고 확고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발터의 올곧은 성격에 경탄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이 옹고집으로 변하려 할 때 유연한 방향으로 유도했습니다. 제 임무는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이 아예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속
예전에 두 사람은 함께 스키를 타러 갔다. 하지만 “발터가 산을 걸어 오르는 뒤부터는 저는 같이 가지 않습니다.”라고 가이스트되르퍼는 말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많은 팬이 ‘키다리’라 부르는 뢰를은 몇 년 전부터 슬로프에 오를 때 리프트를 타지 않는 것이다. 뢰를이 이에 대해 주목할 만한 일화를 덧붙인다. “1980년 포르투갈의 아르가닐(Arganil) 스페셜 스테이지에서 짙은 안갯속에 모두를 따돌렸습니다. 시정거리가 5m도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1, 2위 차이가 4분 58초나 되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는 제 기억력도 좋았지만 제 체력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뢰를은 평소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으며, 매일 아침 자택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다. 그러지 않으면 100살 노인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또한 매일 체중을 재고 그 결과에 대처한다. “체중이 400g이 더 나가면 더 오래 수영을 하거나 더 빨리 스키 슬로프를 걸어 올라갑니다.” 금욕적 생활방식으로 유명한 뢰를은 오늘날까지도 콜라도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전속력
1980년대 스페셜 스테이지에서는 안개가 짙은 밤이면 가이스트되르퍼가 미등의 퓨즈를 뽑아, 뒤따라 오는 경쟁팀이 그들의 주행로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퓨즈를 담배 은박지로 만들어서 안전벨트를 매고도 손가락 끝으로 잡을 수 있게 했지요.”라고 65세의 가이스트되르퍼는 각별했던 승부욕을 설명한다. 무서운 적은 없었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출발할 때마다 자신했습니다. 우리에겐 실수가 없다고 믿었으니까요. 돌이켜보니 터무니없는 확신이었지요.”라고 뢰를은 말하며 고개를 젓는다.
가장 위험했던 주행은 언제였을까? “미국 콜로라도주의 피크스 피크(Pikes Peak)산에서였습니다. 당시 코스에는 자갈만 깔려 있었습니다. 방향을 알 수 있는 지형지물이라고는 출발 지점의 나무 몇 그루가 다였습니다.” 1983년 몬테카를로 랠리에서는 위험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겪었다. “타임 컨트롤을 하면서 누군가 우리에게 오렌지를 줬습니다. 운전석 뒤에 오렌지를 던져놓고 잊고 있었는데 브레이크를 밟을 때 갑자기 오렌지들이 페달 아래로 굴러드는 겁니다. 20분 동안의 르물리농 앙트레그(Le Moulinon-Antraigues) 스페셜 스테이지가 한창인데 말이에요! 7분 뒤에야 오렌지를 모두 주워 모았습니다. 전속력으로 달리면서요.스테이지에서는 3초 차이로 우승했습니다.”스키 강사 자격도 있는 뢰를은 자신의 운전 방식을 이렇게 회고한다. “저는 항상 스티어링휠을 적게 돌렸습니다. 관객에게는 멋진 쇼를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랬기에 가장 빨리 달렸습니다. 이는 스키와 비슷합니다. 눈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면 멋있게는 보이지만 최선의 활강로는 아닙니다.”
9월이면 뢰를은 레이싱 스포츠에 입문한 지 50년을 맞는다. 1968년 그는 한 절친한 친구의 설득에 따라 랠리 바바리아(Rally Bavaria)에 처녀 출전했다. 그 후 바로 주교구 사무국 토지 관리 사무원직에서 사직했다. “저는 주교의 자가용 기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헛소문이 어떻게 수십 년 동안 가라앉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 뒤로는 단 하나의 목표만 염두에 두었다. “몬테카를로 랠리를 제패하고 싶었지요.” 그는 1980년부터 1984년까지 네 번 우승에 성공했다. 눈길도,자갈길도, 아스팔트 도로도 거침없이 달렸기 때문이다. “도로마다 뛰어난 레이서가 있었지만 저는 도로가 어떻게 바뀌어도 제 이상적 주행로를 유지하며 질풍처럼 달렸습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몸을 뒤로 기댄다. “1980년 최초의 몬테카를로 우승이 평생 경력에서 가장 멋진 체험이었습니다.”
감속
가이스트되르퍼는 뢰를 없이 밀레 미글리아를 이미 다섯 번 달렸고, 뢰를은 가이스트되르퍼 없이 한 번 주행했다. 두 사람이 밀레 미글리아에 처음으로 함께 참가하며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희가 무척 사랑하는 나라에서 랠리를 펼치게 되어 가슴이 벅찹니다. 이탈리아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탈리아인들이 자동차광이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인들은 밀레를 사랑하지요.”라고 뢰를은 말한다. 가이스트되르퍼는 분위기와 경치를 즐기고 싶어한다. 그는 뢰를보다 하루 먼저 도착할 것이다. 기술 검사와 전통적인 봉인에도 참석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승은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이 모는 포르쉐 356은 차량 연령이 62년으로 신차에 속하기 때문이다. “2차세계대전 전 차량들은 벌점을 일정 비율 공제 받으므로 우승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물론 제어하기도 더 힘들지만요.”라고 가이스트되르퍼는 설명한다. 뢰를이 덧붙인다. “356은 느린 와이퍼에서부터 감속이 시작됩니다.”
뢰를은 얼마나 더 오랫동안 주행을 할까? “플러그가 뽑힐 때까지요.” 이렇게 대답하고 웃으며, 포르쉐를 몰고 몬테리조니의 유서 깊은 아치문을 통과한다. 이 순간 이 세상 그 누구도 레이싱 스포츠로부터 그를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오, 야옹이구나!” 뢰를은 이렇게 소리치더니 차를 멈추고 운전석에서 내린다. 몸을 굽히고 팔을 내뻗어 길가의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1000 미글리아
1 구간:
브레시아 ▶ 체르비아 밀라노 마리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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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비아 밀라노 마리티마 ▶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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